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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역사 알아보기

by 나의 반 쪼기와 함께 2022. 12. 13.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2월 초부터 거리에 하나둘 전구가 달리고 커피숍이나 라디오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오늘은 세계인들 누구나 좋아하는  크리스마의 역사와 

한국 성탄절의 시작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역사

 

▣ 메리 크리스마스의 뜻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의 의미는 그대로 번역하면 ' 그리스도의 탄생일 ' 이란 뜻으로 예수를 다른 말로 그리스도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어로 Christ라고 하며 Mass는 미사 예배를 뜻합니다. 크리스마스의 약자로 X-mas라고 쓰이기도 하는데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글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앞에 붙은 Merry  Merrily가 줄여진

단어로 ' 명랑하게 즐겁게 ' 가는 의미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풀어 해석하면 예수에 대한 예배를 즐겁게 드리자라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노엘(Noe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도 한다.

 

▣ 크리스마스의 역사

 

일반적으로 성탄절,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며 전날인 24일을 크리스마스이브(Christmass Eve)라고 한다.

신약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1월 1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지만 교회 차원에서 성탄절을 축하하지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성탄절이 12월 25 이로 고정이 되어 온 것은 교황 율리우스 1세(재위 337~352) 때인데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1월 6일 탄생을 기념했으나 4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점차 12월 25일을 탄생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현재 러시아 정교회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1월 7일에 성탄절을 맞고 있는데 이는 개정된 그레고리력에 따르지 않고 율리우스력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율리우스력의 12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월 7일이 된 것입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에서 성탄절은 공휴일로 공식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 하루만 휴일로 더었고 이를 축하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성탄절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성탄절은 이웃사랑과 자선이 중시되고 과거의 축제 관습이 더해지면서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가족 단위로 즐기는 날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santa claus)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입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부활하였습니다.

아울러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정산 등 서민 가정에서도 크리스마스를 즐기게 되었으며 오늘날 축하하는 성탈절을 보낸 것은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성탈절 문화는 급속히 확대되어 영국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축하하는 날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의 중심 행사인 미사는 초기부터 교회에서 한밤중에 행해졌습니다.

한국의 성탄절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요? 

 

▣ 한국 성탄절의 작은 역사

 

한국인이 경험한 첫 크리스마스는 1886년 12월 24일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만든 크리스마스트리가

한국 성탄절의 첫 시작입니다. 한국의 첫 산타클로스는 아펜젤러 선교사였습니다. 1887년 10월 최초의 한국 교회인 ' 정동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 가 각각 설립된 후 12월 25일 주일에 아펜젤러 선교사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탄절에 대해 이야기했고 양말에 선물을 담아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첫 성탄절이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크리스마스 양말 이야기


전설에 따르면 세명의 착하고 예쁜 딸을 가진 귀족이 있었습니다. 딸들은 결혼을 할 나이가 되었지만 가난한 아버지인 이 귀족에게는 딸들에게 줄 지참금이 없었습니다. 착한 세 딸들과 그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전해들은 성 니콜라스는 그 집의 굴뚝으로 금화 세 주머니를 떨어뜨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 금화 주머니가 마침 말리기 위해 벽난로에 널어 둔 딸들의 양말로 들어갔는데 그 이후로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기 위해 벽난로 선반이나 집안 곳곳에 양말을 걸어놓게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소년들은 산타 클로사가 준 선물로 알로 엄청 기뻐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이날 김명옥에게 첫 여성 세례의식을 하였는데 언더우드의 경우 성탄절 주일 예배에서 한국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한국의  첫 성탄절

1896년 12월 24일 ' 독립신문 ' 에는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이라는 성탄절 소개하는 기사가 처음 실렸습니다. 이듬해인 1897년 배재학당의 성탄절이 독립신문에 소개됐고 1896년 최병헌이 ' 대 한크 리스트인 회비'에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습이 점점 흥황 할 줄로 믿노라 하며 이날의 확산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1920! 1930년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본격적인 상업성을 띠기 시작해 모던걸과 모던 보이들은 성탄절에 여흥을 즐기는 것이 유행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6년 매일신보에는 실린 글을 보면 '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이들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 '라는 제목의 기사가 살렸다고 합니다. 그 후 크리스마스는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규제하에 철퇴를 맞으며 점차 수 그러 들기 시작하였는데 이건 크리스마스는 우울한 날을 의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은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였으나 12월 31일에는 예외를 적용 이후 성탄절은 미군 포고령에 의해 휴일로 지정되었으며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성탄절을 휴일로 법제화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공휴일 정책의 특수한 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45년 9월부터 1982년 1월까지

행해진 야간 통행금지가 12월 24일 성탄절 이브에는 한시적으로 해제되었다는 사실도 성탄절을 한국인들이 특별한 날로 인식하고 있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현재 성탄절은 특별히 종교와 상관없이 한국인 대부분이 한해를 마감하는 세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가져다주는 선물을 받은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주는 날이며 12월이 되면 울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12월의 

단골로 나오는 음악이 되었고  또한  한 해가 저물어감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탄절이 중요한 하나의 중요한 날로 이어져온 만큼 올해도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며 다가올 성탄절을 가족과 혹은 친구, 연인과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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